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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것보다 생명이 중요하다
편집자 기자 / 입력 : 2020년 11월 06일(금) 11:07
공유 : 트위터페이스북미투데이요즘에

활뫼지기 박종훈(궁산교회 목사, 고창 심원면) 


얼마 전 우리 동네에서 사셨던 김홍식 어르신이 구십 삼세를 일기로 천수(天壽)를 누리다가 집에서 평안히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그분이 남긴 생명존중과 가족사랑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삶으로 보여 주었다.

필자는 그 분 생전에 직접 들었던 이야기를 이 글에 담아 보고자 한다.

민족의 비극인 6·25 전쟁이 70년이나 지난 오늘이지만 좌우 이념 갈등과 잔재는 여전히 우리의 발목을 잡으며 고질적인 파벌과 대립을 부추기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사상과 종교, 양심적 표현의 자유가 분명히 있기에 나와 다른 생각이라도 서로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인류 보편적인 덕목의 최고는 생명존중일 것이다.

나와 다른 이념을 가지고 협조했다는 이유로, 기본적인 절차도 무시하고 함부로 목숨을 헤치는 일들이 이곳 고창에는 여러 곳에서 일어났었다. 처음에는 공산당과 좌익들로부터 학살이 있었고, 나중에 군·경이 들어왔을 때는 좌익에 협조했다는 부역의 혐의로 무고한 양민을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그 당시 대다수 의식(意識) 없는 농민들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를 분별을 못했다. 그저 살기 위해서 낮에는 국군에게 협조하고 저녁에는 빨치산에게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잔인하게 살해당한 모습을 본 가족들은 인간적 본능으로 원수를 갚기 위해서 어느 한 쪽에 서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했던 서글픈 비극의 역사였다. 돌이켜 보면 이념(理念)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고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어제의 적이 오늘은 친구가 되는 것이 세상 역사이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가장 소중한 존재이다. 그 어떤 이유로도 목숨을 정당한 절차 없이 함부로 헤칠 수 없는 것이다. 한 인간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국가적 상황과 문화를 알아야만 비교적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고 김홍식 님은 민족의 좌우 갈등 속에 휘말리면서도 가족의 소중함과 생명을 존중하는 의롭고 위험한 시간들을 보냈다. 평소 성실하고 어른들을 공경하며 공과 사를 분별할 줄 아는 분이었다. 해리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함평 삼양염업사 급사로 사회의 첫 발을 내디뎠다. 이후 해리 삼양염업사 세 부서 중 한 부서의 장으로 퇴직을 한 이력이 그분의 삶을 증명하고 있다. 지금으로 말하면 대기업의 간부였던 것이다.

6·25 때 당시 나이는 21살이었다. 삼양염업사는 해리면 동호리에 있지만, 그 당시 지서(支署)가 있을 정도로 흥왕한 지역이었다. 평소 김홍식 님에게 호감을 가진 지사장은 인민군이 내려오자 회사 책임자들과 급히 도망하면서 살림과 가족들을 맡기고자 했다. 난리 통에 그 가족들을 보호한다는 것은 심히 위험성을 알기에 처음에는 거절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계속 사정을 하자 이 문제를 조부님과 부친과 의논을 했다. 그 때 조부님이 하신 말씀은 사람이 어려울 때 도와주어야 도리인 것이다라며 가족들을 데려오라고 하였다. 그 아버지도 순종하며 처조카를 시켜 소달구지를 빌려주었다고 한다. 저녁 늦게까지 그 집 살림을 싣고 와서 곳간에 넣고 갈퀴나무로 덮었다. 그 당시 조부님은 지역에서 인정받는 유교의 선생으로 무장, 정읍, 장성 향교의 추천으로 영당(靈堂)을 주택 뒤에다 건축하였다.

인민군 세상이 된 지 한 달쯤은 무사히 지냈으나, 혈안(血眼)이 된 좌익들은 김홍식 님을 잡기 위해서 가족을 내세우며 닦달하기 시작했다. 우익 경찰에 협조한 반동분자로 알고 있었다. 동네에서 은밀히 숨어 지냈지만 형수씨를 내세우며 집집마다 뒤지고 다녔다. 협박당한 형수씨는 집안사람들 다 죽는다며, 이미 아버님을 붙잡아 묶어두었다고 했다. 더 이상 자신 때문에 식구들에게 위험을 줄 수 없어 자수하게 되었다. 그 당시 죽곡마을 출신인 김모씨는 전라북도 빨치산 대장이라고 하였다. 그 집에 끌려가서 그때부터는 무조건 구타를 당하기 시작했다. 그 후유증으로 평생 청각 장애를 안고 살았다. 그날 저녁에 조부님이 찾아와서 홍식이 어디 있냐?” “! 여기 있어요.” “당장 풀어놓아라!” 서슬 퍼런 조부님의 호통소리에 빨치산 대장의 아버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밖에 없다며 결박을 풀어 주었다. 평소 조부님을 선생이라 부르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구타를 많이 당한 어르신은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빨치산 대장 아버지 집으로 일단 갔다가 새벽 2시쯤 거기서 도망을 갔다. 막상 나왔지만 갈 데가 없어 고민하다 동호 회사 근무지로 갔다. 동호 분주소는 인민군이 차지하고 있었다. 분주소장의 아버지와는 평소 잘 아는 관계였다. 한 밤중에 찾아온 김홍식님을 알아보고 이미 어떤 상황인가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 아들은 지역 좌익 대장으로 그 당시 삼양염업사 창고지기로 근무했기에 부자간 다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반갑게 받아주면서도 자신의 능력으로는 힘을 쓸 수가 없다고 한다. 김홍식님은 여기에서 더 피할 데가 없었기에 그분에게 사정을 하였다. 그분은 우선 자신의 집에 있으라고 하며, 날이 새면 고창에서 인민공화국 검찰소장이 오기로 했으니 그분과 면담을 주선하겠다고 약속했다.

오전 10시경 거구의 신체를 가진 소장이 오자 땅에다 바짝 엎드렸다고 한다. “동무, 고개를 들라? 정신 멀쩡하구먼! 동무, 나하고 같이 가서 일할 수 있소?” 소장이 말하면 죽으라는 시늉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무조건 , 하고 고창 검찰소에 가게 되었다. 그곳은 전에 전매소 자리였다.

낮에는 관사 청소를 시키고 작은방에서 숙식을 하며 점점 집 관리를 맡기면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후 20여 일을 지나서 고민을 물어보자 그동안 사정을 다 이야기했다. 그러자 안심하라며 검찰청 총무과장 신분증을 만들어주었다. 그 당시 총무과장은 모든 업무를 다루는 자리였기에, 서류와 옷가지 사무실의 전반을 다 맡아서 관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취급하는 죄인 12명을 상대로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 후 한 달 후인 9월경에 국군이 올라오기 시작하자 검찰총장은 급하게 서류를 소각시키라며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김홍식님은 소각 이유를 물어보았다. 검찰청장은 오늘 고향 이북에 며칠간 다녀온다며 관사를 잘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오늘 저녁 모든 죄수들을 다 총살시키니 놀라지 말라는 말을 하였다. 김홍식님은 그 자리에서 우리 죄수들만이라도 살려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하였다.

자신이 사지(死地)로 몰릴 때 가족들이 당했을 고통을 생각하며, 죄수들의 가족을 나중에 어떻게 만날 수 있겠냐며 사정을 하였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곰곰이 생각하더니 동무 말이 옳구먼!” 하고 허락해 주었다. 이후 저녁 9시경에 내무서에 갇힌 12명을 줄에 묶어있는 상태에서 데리고 왔다. 인계받은 후 급히 검찰청장이 떠나자마자 모두 풀어주었다. 그리고 막상 가려는데 오갈 데가 없어, 자신이 풀어준 고창읍내에 사는 한 20년 연상인 김근 집에 가게 되었다. 깜짝 놀라 영접하며 어찌된 일인지 물어보자 지금의 과정을 설명해주었다. 30분 후쯤에 산 쪽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났다고 한다. 인민군들이 다른 죄수들을 학살하고 도주했던 것이다.

그분은 김홍식님을 안심시키며 열흘 동안 그 집에서 같이 지내었다. 이 후 조심히 고향인 궁산 마을에 오게 되었다. 몇 달이 지난 후 군, 경찰이 해리 쪽에서 수색하면서 몰려오기 시작했다. 오전 9시경 방송이 들려왔다.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나오라고 하며, 만약 집에 숨어있다 잡히면 죽인다는 경고방송이었다.

그러면서 한 집 한 집 수색하면서 다가오자 김홍식님은 손들고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이제는 인민군 부역자로 꼼짝없이 잡히게 될 것 같은 두려운 마음으로 나갔다. 이때 어떤 지휘관인 한 군인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고개 숙인 놈. 머리 들어라?” 얼른 인사를 극진히 하면서도 속으로 이제는 죽었구나!’ 하며 고개를 들었다. “너 같이 바보 같은 사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어서 들어가라.” 그 말에 얼른 집으로 갔고 그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그 군인이 왜 그런 말을 했으며 그가 누군지 모른다고 한다. 다만 자신을 살려주기 위한 배려이며, 전에 죄수들을 살려준 일과 관련된 사람이라 추측하고 있다. 그 어느 지역보다 가장 민간인 희생자가 많았던 고창 지역은, 낮과 밤이 교차될 때마다 좌우를 넘나들며 살고자 했다. 하지만 양 진영에 의해 억울하게 이유도 분명치 못한 채 희생된 사람들이 많았던 참상이었다.

그런 중에도 김홍식 어르신은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를 지키며, 남의 생명을 살리려는 그 용감한 행동이 도리어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눈앞의 이득과 자신만을 중시하는 물질만능 시대에서, 남을 살리는 것이 결국 나를 살린다는 평범한 진리를 고인은 체험했던 것이다. 코로나 재앙 속에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생명존중, 이웃과 공동체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게 하는 삶이었다. 그 무엇보다도 생명을 가장 존중히 여기는 가치를 교육, 사업, 정책, 생활 속에서 뿌리가 깊이 내려야 할 때이다.

편집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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