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고창범대위·도의원·군의원 등이 8월4일 세종정부청사 산업부 앞에서 고준위방사성폐기물법 시행령(안) 개정을 촉구했다. | ⓒ 주간해피데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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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4일 세종정부청사 산업통상자원부 앞. 노란색 조끼를 입은 조규철 고창군의원(고창범대위 위원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첫 외침은 “주민동의권 보장”이었다. 김성수 전북도의원, 임정호·오세환·이선덕 군의원, 황승수 고창시민행동 공동대표, 방채열 고창군선주협회장까지 30여명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핵폐기물에 대한 주민동의권을 보장하라, 주변지역을 5킬로미터를 30킬로미터로 바꿔라, 처분시설 건설 못할 경우 책임·이행정차를 명시하라.” 고창군 한빛원전 범군민대책위원회(고창범대위)가 정부에 던진 요구는 세 갈래였지만 목적은 하나였다. ‘사용후핵연료 부지내저장시설’(건식임시저장시설) 추진을 담은 고준위방사성폐기물법 시행령(안)을 주민 동의 없는 상태로 확정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다.
48시간 뒤인 8월6일, 고창청소년수련관에서는 고준위방사성폐기물법 시행령(안) 산업통상자원부 설명회가 열렸다. 설명회장은 거듭된 “답변이 부족하다”는 군민들의 거센 야유와 퇴장도 불사한 군민들의 항의로 삽시간에 팽팽해졌다. 끝내 “오늘은 공식적으로 파토”라는 선언이 나왔고, 산업부 관계자는 “어려움이 있다”는 식의 면피용 말만 남겼다.
이틀 사이에 드러난 것은 ‘5킬로미터’라는 숫자가 고창군민에게는 생존선, 정부에게는 법적·재정적 관행이라는 사실이었다. 핵폐기물 관리 여부를 결정·동의할 권리는 주민에게 귀속되는 당연한 당사자권임에도, 정부는 의견 정도는 들을 수 있지만, 핵폐기물에 대한 결정·동의권은 주민에게 주지 않겠다는 입장을 노골적으로 고수했다. 두 날의 현장을 따라가며 고창군민이 체감하는 위험, 정부의 해석, 그리고 남겨진 과제를 기록한다.
세종에서의 외침―“주민투표 없이 영구 핵폐기장이 될 수 없다”
7월24일 한빛원전 앞 궐기대회, 그리고 8월4일 세종정부청사 앞 피켓시위. 범대위가 거리로 나선 것은 정부가 7월1일 입법예고한 시행령안 때문이다. 법안은 ‘원전 부지 내’ 임시저장시설을 허용하면서도 주민의견수렴 방식을 설명회(토론회)·공청회로 한정했고, 무산 시 생략도 가능하다고 명시했다. 조규철 위원장은 “최소 50년, 최종처분장 미확보 시 사실상 영구 핵폐기장인데 정작 당사자는 들러리”라고 맹렬히 성토했다.
고창범대위가 산업부 면담에서 꺼낸 요구는 세 가지다. 첫째, 임시저장시설 설치 여부는 공청회·설명회가 아니라 주민투표나 지역공론화(숙의형)로 결정할 것. 둘째, 주변지역 범위(주민수용성 및 지원 범위)를 원전 반경 5킬로미터에서 후쿠시마 사고 이후 국제·국내 기준이 된 30킬로미터 방사선비상계획구역으로 넓힐 것. 셋째, 2050년 중간처분시설, 2060년 최종처분시설을 못 지을 경우를 대비한 보완 절차를 시행령에 명문화할 것.
조규철 위원장을 포함한 30여명은 ‘동의 없으면 건설 없다’ 등을 적은 피켓을 들었다. 요구안의 첫째 자리는 주민동의권이었다. 시행령안이 설명회·공청회만으로도 절차를 마무리할 수 있도록 만든 조항은 “당사자를 방관자로 만드는 독소”라는 비판을 받았다. 산업부 원전산업정책국장은 “지역 의견에 귀기울이고 주민 목소리를 반영하겠다”라고 했지만, 구체적 주민동의권 도입 여부에는 고개를 젓는 데 그쳤다. 주민들은 “의견 청취가 아니라 선택(동의) 권한”을 요구하며 청사를 향해 격렬히 구호를 외쳤다.
산업부 원전산업정책국장은 “지역 의견에 귀기울이고 주민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8월6일 고창설명회에서 답변을 약속했다. 그러나 면담 자리에서 그는 “임시저장시설 위험 범위는 5킬로미터면 충분하다”, “주민수용성 확보 방식은 추후 검토하겠다”, “처분시설 미건립 시 책임 규정은 명문화하기 어렵다” 등 판에 박힌 대답만 되풀이했다.
위험·권한 불균형―“5킬로미터, 누구를 위한 기준인가”
고창범대위가 강조한 두 번째 의제는 원전 주변지역 범위였다. 정부안은 발전소 반경 5킬로미터만 ‘주변지역’으로 규정하며 지원·주민수용성 권한까지 묶었다. 그러나 후쿠시마 사고 뒤 국제·국내 기준은 30킬로미터 방사선비상계획구역을 기본 위험 구역으로 인정했다. 고창군 상하면 석남리·자룡리는 5킬로미터 안에 들지만, 무장·심원·흥덕 일원은 30킬로미터 안에만 포함돼 권한·지원 체계에서 빠져 있다. 주민들은 “위험은 30킬로미터, 권리는 5킬로미터”라고 거세게 규탄했다. 즉, 5킬로미터~30킬로미터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위험만 있고 권리는 없다. 산업부 관계자는 “예산·인구를 고려한 법적 관행”이라고 해명했지만, ‘관행이 생명권(신체·생명의 안전이 침해받지 않을 권리) 위에 설 수 있느냐’는 물음은 비워둔 채였다.
책임 없는 기한 설정―주민들이 요구하는 ‘강제 이행장치’
주민 요구의 세 번째 항목은 시행령에 ‘처분시설 건설을 기한 내 실패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지를 명문화하라’는 것이다. 정부 계획은 2050년 고준위(사용후핵연료) 중간저장시설(중간처분시설), 2060년 고준위 최종처분장(최종처분시설)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후보지 선정 갈등이 장기화될수록 부지내저장시설(임시저장시설)은 사실상 영구화된다. 더욱이 근본적으로 최종처분장 부지를 현실적으로 찾기 어렵다는 구조적 한계가 임시저장시설 영구화의 요인으로 지적된다.
범대위는 “임시저장시설 기한을 준수하지 못할 경우, 처분시설을 기한 내 건설하지 못할 경우, 강제적인 대응방안이 명문화돼야만, 기한 초과가 일어나더라도 지역주민의 안전권·결정권과 국가의 책임성 사이에 최소한의 균형이 확보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산업부 측은 대응방안을 사실상 외면했고, 구체적 입장이나 후속 검토 약속도 내놓지 않았다. 다만 특별지원금 규정에 “처분시설에는 해당되지만 임시저장시설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법 해석만 전달하며 주민들의 공분을 키웠다. 위험을 관리·통제할 주체와 절차가 명확히 규정되지 않으면, 그 위험 자체도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방치될 뿐이다.
고창 설명회장의 균열―답 없는 정부, 무너진 신뢰
8월6일 오후 2시. 고창청소년수련관으로 들어선 주민들의 손에는 형형색색의 ‘반대’ 피켓이 들려 있었다. 사회를 맡은 산업부 실무자는 고준위방폐물법 시행령(안)을 설명하려고 했으나, 주민들의 요구에 대한 답을 듣지 않는 한 설명회를 진행할 순 없었다. ▲주민투표나 지역공론화 요구에 대해, 정부 측은 “법 18조가 갈등 발생 시 공론화를 규정하고 있다”며 “주민투표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법 18조의 공론화 규정은 설명회·공청회 쪽으로 경도된 의견수렴이지, 숙의형 공론화를 선택하기 어려운 구조다.)
▲주변지역 30킬로미터 확대 요구에 대해, 정부 측은 “방재 개념과 지원 범위는 다르다. 중저준위처분장·경부방폐장·발전소주변지역법도 5킬로미터”라며 예산·인구 등의 현실적인 제한으로 30킬로미터 반영은 어렵다는 입장을 보였다. ▲중간·최종처분시설 목표 불이행 시 대책방안에 대해서는, 정부 측은 기한 내 노력 외에는 별다른 고민이 없었으며, 특별지원금조차도 임시저장시설은 해당되지 않는다는 답만 돌아왔다.
조규철 위원장은 “원전 운영 과정에서 5킬로미터 주민들만 피해 당사자냐, 국제기구도 30킬로미터 위험을 인정했는데 왜 산업부만 5킬로미터 기준을 고수하느냐”고 성토했다. 참가자들은 “답다운 답이 하나도 없다” “산자부 국장조차도 안 오는 거냐”며 줄줄이 퇴장했고, 설명회는 사실상 중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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