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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금정이 아니라 첨금처”
이기화 소장의 ‘고창의 역사·문화 이야기’ 두 번째 <br>고창지역의 역사지명~향·소·부곡·처·촌·점에 대한 특강
김동훈 기자 / 입력 : 2013년 02월 05일(화)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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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데이고창과 함께하는, 이기화 고창지역학연구소장(전 고창문화원장)의 ‘고창의 역사·문화 이야기’ 강의가 지난 1월 29일(화) 오후 4시~6시, 고창군립도서관 1층 회의실에서 개최됐다. 작년 11월 22일 열린 첫 번째 강의(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재정지원)가 참석자들로부터 호응과 열기가 있어, 본지는 이후 ‘고창의 역사·문화 이야기’ 강의를 정기적으로 열자는 계획을 세웠다.
이번 두 번째 강의는 ‘고창지역의 역사지명~향·소·부곡·처·촌·점에 대한 특강’이란 제목으로 이뤄졌다. 이기화 소장은 우선 ‘향·소·부곡·처·촌·점의 뜻을 설명하고, 옛 고창현·흥덕현·무장현에 있는 역사지명들을 현대의 지명들과 연결지어 그 의미를 살펴보았다.
이번 강의의 핵심은 ‘첨금처’(沾襟處)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현재 무장면 송현리에는 ‘沾襟亭’(첨금정)이라고 쓰여진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또한 ‘萬歷 二十五年 十月 統制使 李舜臣 銘’(만역 25년 10월 통제사 이순신 명)과 김해김씨 장사군파 즉 무장김씨인 김위와 그 자손들의 성명이 새겨져 있다.
전북일보 2009년 9월 15일자에 따르면, “첨금정은 충무공 진영의 진하장으로 임명돼 진도 전투에서 독화살을 맞아 순절한 김위(1567년~1597년)가 주인공”이라며, “이순신은 총애하던 부하가 전사하니 슬픔을 억제할 수 없어, 출장길에 친히 관을 하사해 입관한 후, 김위의 본가까지 호송·치장하고, 묘 앞 바위에 앉아 눈물로 갑옷을 적시며 국사를 한탄해, 이 때부터 김위의 순절비를 첨금정이라고 일컫게 됐다”고 보도했다. 이것은 전라금석문연구회와 전북역사문화학회의 주장이다. ‘沾襟’(첨금)이란 ‘옷깃을 적시다, 눈물을 흘리다’라는 뜻이다.
이기화 소장은 이 주장이 거짓이라고 일갈했다. 충무공이 무장면 송현리에 왔다는 기록도 없을뿐더러, “구한말 어수선할 때 저질러놓은 후손들의 농간이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즉 김위의 후손들 중 일부가 바위에 글자를 새겨넣었다는 것이다. 고(故) 배성수·정익환·성하윤 전 무장향교 전교들이 1979년 추계석전일 시 무장향교에서 증언했다고 한다.
이기화 소장은 무장면 송현리는 고려시대부터 ‘첨금처’라는 지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첨금’이라고 불린 이유는 이순신 때문이 아니라, <관찬지리지>(官撰地理誌)와 <여지도서>(輿地圖書)의 무장현 고적조(古蹟條)에 보면, “멀리 싸움터로 떠나는 사람을 송별할 때, 그 집사람이 눈물로 옷깃을 적셨는데, 옛적에 첨금처라 이르는 곳이다(征人送別時 家人有泣下 故名曰 沾襟處)”라고 쓰여져 있다. 그리고 이곳이 處(처)인 이유는, 궁궐에 상납하는 농산물의 집성지였기 때문이다.
이기화 소장은 “이와 같은 엄청난 역사 왜곡은, 질 높은 고창군민의 역사의식에 먹칠이 아니되겠는가”라며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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