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0년 11월 6일부터 14일까지 부안면 선운리 미당시문학관 인근에서 ‘세계적인 서정시인 미당 서정주 선생의 시문학을 계승·발전’하기 위한 ‘미당문학제’와 ‘질마재문화축제’가 진행되었다.
이번 행사는 미당 서정주 시문학을 현창(顯彰)하고, 우리지역 고창을 관광명소로 밖으로 널리 알려 지역주민들 소득증대에 기여하고자 하는 충정어린 심정의 발로였으리라고 미루어 짐작한다. 하지만 축제위원회 위원들의 의도와는 달리, 그 속에 큰 고통과 슬픔, 모순이 함께하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아, 참으로 기막힌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김갑성 축제위원장을 비롯해 축제위원들은 여러분의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께서 어떤 시대, 어떤 삶을 살았는지 한번이라도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 그 분들은 일제 강점기 천대받고 배고픈 설움보다, 더 크게 내 민족 내 형제들의 배신과 압제속에서 치를 떨며 살아오지 않았을까. 그것도 저 멀리 경상도, 충청도 사람이 아닌 바로 이웃들이 아니었나. 침략자로 들어온 일본인이야 그렇다치고, 내 이웃 내 형제들이 그들(일본인)에게 빌붙어 쥐꼬리만한 권세로, 쥐꼬리만한 이익을 위해 우리 할아버지·할머니에게 가한 고통을 한번이라도 생각해보았는지 의문이다. 단 여러분의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친일파이거나 밀대꾼이었다면 예외일 수는 있다.
둘째, 지금 축제위원회 명단은 길이 보존될 것이며, 그것이 여러분의 후손들에게도 전달될 것이다. 다행히 후손들이 여러분의 생각과 같아, 친일파 서정주를 흠모하는 사람이면 다행이겠으나, 그렇지않고 ‘친일파를 추종하는 제2의 친일파’로 여러분을 규정하고 부끄럽게 생각한다면 어찌하겠는가. “그는 훌륭한 시인, 세계적인 시인이니 설사 ‘내 민족에게 일본 천황을 위해 한 목숨 기꺼이 바쳐도 좋다’는 그의 언행은 별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의 나는 ‘나의 주관이 아니라 시류에 따라 그리하였노’라고 이야기하겠는가.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본인의 입장을 미리 밝혀 두면 어떻겠는가. 마지막으로 지금 시문학관 건너 마을 신흥에 사는 김균태를 아시는지요. 균태는 직장 다니느라 광주에 있고, 그 어머니 오 여사 혼자 살고 계시더군요. 균태가 누구냐구요. 말씀드리면, 1886년(고종 23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냈으며, 1894년(갑오년) 9월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때 참여하여 종횡무진 활약하였고, 패전 후 관군에게 체포되어 1895년 1월 5일 고창현에서 처형된 동학농민군 김양두(金洋斗, 1845~1895)의 증손자이다.
질마재문화축제위원회 위원 여러분. 여러분이 진정으로 내 고장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면, 또 지금 우리가 인간평등의 사회를 구가하고 있다고 한다면 서정주의 시문학관을 밀어버리고 그곳에 동학농민군 김양두의 기념비를 세우고 ‘지금 우리들의 삶이, 우리들의 행복과 권리가 100여년 전 여러분의 고귀한 희생위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추모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랬을 때 외지에서 누가 오더라도 과연 고창은 말 그대로 ‘의향고창(義鄕高敞)’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 모습이 진정 우리가 보여주어야 할 모습 아니겠는가.
축제위원 여러분, 여러분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제발 서정주와 관련된 모든 행사나 축제는 중지해 주십시오. 학문적으로 꼭 필요하면, 필요한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가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서정주를 들썩거려 국화향기를 맡고자하면 할수록, 내 민족에 대한 배신의 썩은 냄새도 함께 진동함을 왜 모르십니까. 앞으로 모든 행사는 폐기처분해 주십시오. 그리고 무덤으로만 남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또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 편집자주 - 친일도 부일도 아닌 하늘의 순리에 따른 일본 편)’도 함께 묻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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